중독, 혹은 집착에 대하여

아마 재작년 여름 끝무렵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LA에서 연수 생활을 마친 남편이 아이들과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미국에서 설립한 회사를 팔기 위한 협상을 하고 있었다. 나름 용기를 가지고 벌여놓은 일이었지만, 미국에서의 사업은 초기 셋업 이후 funding source를 구하지 못해서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당시의 희망이라면 이동통신사와의 계약으로 대량의 컨텐츠를 팔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될듯 될듯한 계약은 쉽지 않아 보였었다. 마침 아시아 컨텐츠를 가진 회사를 찾던 곳이 있어서 사실상 그 협상은 내게는 대단히 중요했다.

하지만, 기업과 조그마한 계약서 하나 주고 받는 데도 한, 두달은 족히 걸리는 법, 서로 시간끌지 말자고 전제하고 시작한 협상이었지만 제법 몇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 몇달 동안이 내게는 정말로 지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두가지에 빠져 있었다. 하나는 골프였고 하나는 식탐이었다.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쉽지 않은 터라 마음을 비우고 골프나 치자고 결심하고 새벽에 나가서 골프치고 출근을 하거나 업무후 6시부터 9홀을 돌기도 하였다. 세월을 낚는 갑갑함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참기 힘든 일이었음을 하루 하루 절감했는데 매일 매일 대화라도 나눌 가족도 없었고, 그래서 더욱,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골프야 그런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집착하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해소책이었다. 그런데 그 당혹스런 식탐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나로서도 참기 어려운 '병'이었다. 내 병의 증세는 이러했다. 우선, 아침, 점심은 뭐 그저 보통으로 때우는데 해만 지면 먹을것에 대해 욕심이 났다. 저녁을 배가 충분히 포만감을 느낄때까지 먹었다. 그리고 나서는 한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치즈케익이나 과자나, 빵류의 간식과 하겐다즈의 쵸콜렛으로 덮힌 커피맛 아이스크림을 보약 챙겨 먹듯이 먹었다. 원래 나는 단 것도 별로 안좋아하고 아이스크림은 어쩌다 여름에 한번쯤 먹는 별식이지, 거의 즐기지 않았다. (그러니 나의 폭식증은 병이었던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하겐다즈를 먹다가 양이 차츰 늘어 어느날은 4개째를 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스스로 진단컨데 그것은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증이었다.

물론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의지로 이겨보기 위해 참으려 할수록 내 머리속은 온통 하겐다즈 쵸콜렛바에 점령되어 버렸다. 1시간을 '먹으면 안돼, 먹으면 안돼..'를 외치다 결국 유혹에 참패를 하고 냉장고 문을 열곤 했다. 한번은 내 의지를 다지기 위해 마켓 쇼핑 목록에서 지운 일이 있었다. 사다 놓지 않으면 안먹겠지 하는 나의 나약한 계산은 여지없이 오답으로 판명이 났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집착증과 중독증세가 훨씬 심했던 것이다. 그 날 나는 밤 11시 반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Ralphs로 뛰어 갔다. (미국의 마켓은 24시간 하는 곳이 꽤 있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스스로를 자학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면 차라리 이름이라도 거창하고 멋진 것을, 겨우 아이스크림 중독이라니... 조급함을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는 정말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돌이켜 보면 사람이 무언가에 집착하고, 중독이 된다는 것은 마음이 허전하다는 것,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결책?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중심을 잡으면 된다. 물론, 감정이 격할때는, 그냥 풀어주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결국 나의 아이스크림 중독증은 랄프로 뛰어갔던 그날 이후 마음을 바꿔, 그래 어디까지 얼마만큼 먹나 보자 쪽으로 방향을 돌려 먹고 싶을때 맘껏 먹는 것으로, 그리고 저녁마다 헬쓰클럽을 다니는 것으로, 또 인수협상이 진척돼서 샌디에고로 내려가는 준비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우리는 가끔씩 무엇엔가 집착하고, 늘 하던 것에 중독돼있다. 진정 무엇가를 얻고 싶으면 집착을 버리라 했던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마음만큼 쉽지 않음을 느끼고, 또 느낀다. 

by easysun | 2007/06/17 22:54 | H#9 : 4년간의 유학생활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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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윤성군 at 2008/09/26 08:24
잘읽었습니다! 집착,집착,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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